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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 저자조던 피터슨 외
  • 출판사프시케의 숲
  • 출판년2019-07-30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12-05)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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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세계 지성들의 치열한 찬반 토론



    ‘정치적 올바름’, 즉 PC를 둘러싼 4인 4색의 뜨거운 논쟁이 펼쳐진다. 정치적 올바름은 편견 없는 언어를 사용하자는 최초의 취지에서 점점 외연을 넓혀 각종 소수자 우대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부자연스럽고 억압적이며 역차별이라는 비판 또한 거세게 일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한 찬반토론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성별, 인종이 여러 이슈를 놓고 갈등하는 상황을 성찰한다.



    베스트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 저자인 조던 피터슨과 영국의 유명 작가이자 배우인 스티븐 프라이가 반대 팀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PC 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개인주의를 위협하는 집단적, 전체주의적 서사라는 것이다. 이에 맞서 여성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와 열정적인 흑인 사회학자 마이클 에릭 다이슨이 찬성 팀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라는 입장을 옹호한다. 역사적인 불평등에서 비롯된 문화적인 편견과 비대칭적인 권력을 바로잡는 것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자연스러우며 당연하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찬반 양측의 치열한 토론을 관전하며, 오늘날 한국에서도 성별, 난민 등을 이슈로 하여 뜨겁게 발화하고 있는 PC 논쟁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특히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데요.

    정말 혐오스럽습니다.”_조던 피터슨



    ‘정치적 올바름’은 한국의 인터넷 공론장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단어다. 기본적으로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태동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글로벌한 세계의 현실에서, 더욱이 미국의 영향을 심대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점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당장 인터넷 게시판의 설전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 근저에 ‘정치적 올바름’ 개념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 올바름’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정치적 올바름’은 영어로 ‘Political Correctness’로서 소수자들을 차별, 배제하는 언어 사용 및 표현을 지양하자는 신념, 혹은 그에 기반한 사회운동을 말한다. 흔히 PC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불구자’ 대신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에스키모’ 대신 ‘이누피아크’, ‘후진국’ 대신 ‘개발도상국’,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 ‘결손가정’ 대신 ‘한부모 가족’ 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현재 ‘정치적 올바름’은 단순한 언어순화 운동 차원을 넘어서, 영상이나 게임 등에서의 균등한 역할 배분, 혹은 진학이나 취업, 승진 등에서의 소수자 우대 정책 등으로 확장 적용되고 있다. 성별, 인종 등 여러 집단적 정체성이 합류하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이른바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 일체를 뜻한다.





    “당신은 고약하고 화가 난 백인입니다.

    확실히 지독하고 심술궂네요.”_마이클 에릭 다이슨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인류가 응당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이 책에서 각각 여성과 소수 인종을 대표하는 패널인 골드버그와 다이슨은 ‘정치적 올바름’이 거대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편이며, 따라서 인류 진보의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두 패널은 현재 PC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역사적, 사회적 특권층이 뻔뻔하게도 그들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반동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필경 우스꽝스럽게 회고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찬성 팀이 보기에, 이런 역사의 낙오자들은 ‘계몽’해서라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로 이끌고 가야 할 망아지들이나 다름없다.



    반대 팀인 조던 피터슨과 스티븐 프라이가 단지 ‘이기심’을 드러내는 주장을 했다면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내미는 반대 논거는 퍽 묵직한 대의를 가지고 있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피터슨은 “표현의 자유 없이, 진정한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프라이는 SNS상의 침묵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 검열당하는 듯한 느낌에 대해 토로한다. 이른바 ‘어떤 발언이 PC하지 않으면 어떡하지’에 대한 걱정이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그 토대부터 허물어뜨릴 수 있다.



    아울러 피터슨은 ‘정치적 올바름’이 서구 문명의 위대한 산물인 개인주의를 위협한다고도 주장한다. PC 운동은 정체성 정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 정체성 정치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지우고 집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피터슨이 보기에, 이런 집단주의적 관점 아래에서는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 표현 등이 불행스럽게도 억압당하고 만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PC는 표현의 자유, 열린 토론, 자유로운 사상 교환의 적일까? 아니면 소외된 집단을 배제시키는 지배적인 권력에 맞서 평등하고 정당한 사회를 만드는 것일까? 누군가는 정치적 올바름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자유롭고 열린 토론을 옥죄며, 불필요하게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소외 집단에게 발언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준을 만드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넓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첨예하게 맞서는 주장들 사이에서 독자들이 각자의 올바른 길을 찾아나가길 기대한다.





    토론에 대하여



    이 책은 2018년 5월 1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멍크 디베이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멍크 디베이트는 피터 멍크와 멜라니 멍크가 설립한 자선단체 오리아 재단의 프로젝트로, 반년마다 세계가 당면한 주요 공공정책 이슈에 대해 논의하는 세계적인 포럼이다. 그간 패널로 스티븐 핑커, 토니 블레어, 헨리 키신저, 말콤 글래드웰, 니얼 퍼거슨, 알랭 드 보통, 폴 크루그먼 등 수많은 명사가 참여해왔다. 이번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토론 역시 현지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세계적으로 핫이슈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데다, 각각의 패널들 역시 쟁쟁했기 때문이다. 방청객 3,000명이 토론 현장을 빼곡하게 채웠으며, 미국과 캐나다에도 C-SPAN과 CPAC을 통해 방송되었다.





    논평에 대하여



    한국어판 부록으로 임명묵의 글 ‘왜 지금 정치적 올바름이 문제인가’를 수록했다. 본 토론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논의 전개가 돋보인다. 토론 패널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에 집중했다면, 논평자는 해당 논쟁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다룬다. 포퓰리즘의 부상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PC 논쟁을 첨예하게 촉발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특히 논평자의 약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으로, 엄청난 독서력을 바탕으로 참신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 인터넷 뉴스 채널 〈슬로우 뉴스〉에 다양한 주제로 원고를 쓰고 있으며, 〈서울신문〉 ‘2030 세대’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PC를 둘러싼 문화 전쟁이 20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측면이 있는데, 해당 주제를 20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도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맞다, 그르다를 따지기 이전에 한국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극화는 여전히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 극화가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념 전쟁의 맥락에서 벌어진다면 더더욱 우려스럽다. 미국인이 아닐지라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는 이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낙선에 좌절했을 것이고, 만약 유럽연합이 시행하는 여성/소수자/다문화에 관한 진보적인 정책을 소개하는 트윗을 본다면 ‘좋아요’를 찍을 것이다. 반면 역시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이들은 유튜브에서 조던 피터슨이 페미니스트 앵커와 논쟁하는 영상을 보며 ‘좋아요’를 찍을 것이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항하는 다른 영미권 식자의 영상에 자막을 입혀 번역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대립구도에서는 한국인 혹은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내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게 된다.

    필자가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이유는 역사적 선례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이슬람 세계의 세속주의-이슬람주의 갈등이 이와 놀랍도록 유사한 구도로 전개되었다.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진보적 고학력자들은, 다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종교 교리의 사회 침투를 막는 세속주의 법안을 지지했다. 반면 고등교육에서 배제되어 온, 농촌이나 대도시 빈민가 사람들은 ‘보편 인권’을 보장하는 세속주의 법안이 스스로의 신앙을 자유롭게 표출할 권리를 막는다고 느꼈다. 이들은 훗날 이슬람주의라는 정치 이념을 만들어내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세속주의자들에 대항하기에 이르렀다(이란과 터키에서는 이 시도가 성공했다).

    사회에서 종교의 위치를 놓고 둘러싼 이 갈등은 국경을 가로질러 초국적 정체성을 만들어냈고, 실질적으로 터키, 이란, 아랍의 세속주의자들은 자국의 이슬람주의자들보다 세속주의자들끼리 ‘서로’ 더 잘 공감했다. 이런 단층선은 1970년대 이래로 이슬람 세계의 국내 정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자국 사회가 타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에 아주 민감해졌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1979년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자 터키와 아랍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대거 동요했으며, 세속주의 성향의 군부는 더욱 큰 탄압을 가했었다.

    작금의 서구 사회가 물론 저발전 상태에 있는 중동 지역과 온전히 등치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종의 유사성은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국의 “빻은” 인간들보다 서구의 개명된 이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 혹은 자국의 “PC충”보다 조던 피터슨의 팬들에게 더 우애를 느끼는 사람들은 서구에서 벌어지는 가장 최신의 뉴스를 한국 웹으로 퍼와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작년에 있던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는가? 이런 논쟁이 생산적 대립구도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국제적으로 연결된 미디어 환경은 오히려 진영의 극화만 계속해서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비생산적 대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최근에 서유럽과 북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의 마비와 기능부전이 우리에게도 다가올 가능성이 충분할지도 모른다.”_203~205쪽





    책 속에서



    16쪽 [스티븐 프라이] 좌파가 저지르는 커다란 오류 중 하나가 뭔 줄 아세요? 적의 명석함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트럼프 일가는 우리가 지성의 기반으로 생각하는 신성한 인문서를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트럼프 일가가 똑똑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죠. 역사가 보여줘요.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28쪽 [조던 피터슨] 우파가 극우로 치달을 수 있듯, 좌파 역시 극좌로 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합니다. 그런데 좌파의 경우 극좌로 치달을 때, 그것이 매우 불분명하게 정의되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확실히 좌파가 너무 극좌로 가버렸다고 생각합니다.



    32쪽 [조던 피터슨] 그러면 남녀 관계의 역사도 근본적으로 억압의 역사로 보겠군요. 이 논의도 아마 그런 식으로 풀려고 할 겁니다. 역사에 언제나 존재해왔던 근본적 재난으로부터 남성과 여성이 ‘협력’해서 벗어난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하려고 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1895년 서구 세계의 평범한 사람은 오늘날 기준에서 볼 때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 기준은 현재 UN이 지정한 극빈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에요, 이 세상의 근본적 현실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다는 거예요”라고 말한 건가요?



    51쪽 [마이클 에릭 다이슨] 흑인들은 인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유색인들도 인종을 만들지 않은 건 마찬가지고요. 여성들 역시 젠더를 만들지 않았죠.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인간성을 빨아들이고 고갈시키는 호수인데, 인간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문제의 중심에 인종을 두는 걸까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정말 미안하지만 대화의 중심에 인종을 둬야겠어요. 경찰이 거리에서 저를 계속 죽이려 들거든요.”



    64쪽 [미셸 골드버그] ‘남자’가 직업을 잃는다, ‘남자’가 결과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정말 새로운 현상이죠. 저는 거기에서 문화적 공포가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처벌받지 않는 문화가 이제는 끝났다는 공포요.



    65쪽 [미셸 골드버그] 저는 사실 그보다 좀더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음, 직장에서는 성기를 끄집어내지 않는 것부터요. 솔직히 저는 여성이 어떤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하고 있는 정도죠. 실제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몇몇 남자들이 요구받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95쪽 [스티븐 프라이] 제가 PC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반드시 성취하고 싶지만 PC는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커다란 실패는 효과적인 것보다 올바른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PC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얼마나 옳은지에만 집착합니다.



    98쪽 [미셸 골드버그] 대체 누가 검열을 하고 있는 거죠? 검열당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고, 트위터 패거리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받는 입장이 된 게 어떤 기분인지도 이해합니다. 악성 댓글과 비난을 받는 것도 그렇고요. 기분 나쁘죠. 그러나 그것은 생산적이지 못한 책략이기는 하지만, 검열이 아닙니다.



    101쪽 [조던 피터슨] 다양성, 포용성, 그리고 공평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그들은 여기서 특히 공평성에 대해서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데요, 그건 정말 혐오스러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에 대해 안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110쪽 [마이클 에릭 다이슨] 근사하게 은유적 표현을 하는 건 멋진 일이죠.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닙니다. 진짜 세상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먼저 말할 것은 사람들의 몸입니다. 사람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예요. 사람들이 폭행을 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섹슈얼리티와 인종 정체성 때문에 다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요.



    113쪽 [조던 피터슨] 개인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개인은 책임을 질 수 있어요. 개인이 권리를 갖는 부분적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은, 어떻게 집단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겁니까? 집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서구가 구축한 사법 체계는 본질적으로 집단이 아닌 개인을 전제로 형성되었습니다. ‘집단이 범한 죄’라는 개념이 정치와 사법 체계에서 기반을 얻을 수 있을 때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그걸 목격했는데, 그 결과는 단연코 재앙적이었습니다.





    115쪽 [미셸 골드버그] 미국의 정치는 개인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집단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는 투쟁의 장이었습니다. 사회를 그저 세분화된 개인으로 구성된 바다로 볼 경우, 이런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합니다. 차별과 배타성을 바로잡기 위해 공통된 정체성을 근거로 사람들이 모이는 게 왜 치명적이죠?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모든 것, 가장 좋은 면 아닌가요? 진정한 진보란 바로 그런 거죠.



    123쪽 [조던 피터슨] 내가 누린 백인이라는 특권이 내가 현재 이룬 성과에 얼마나 기여를 했다는 거죠? 5퍼센트? 15퍼센트? 25퍼센트? 아니면 75퍼센트가 되나요? 당신은 그 점에 대해 내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세금 문제는요? 그 망할 놈의 특권을 누린 덕분에 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춰진 세금은요? 이미 비용을 지불하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136쪽 [스티븐 프라이] 페미니스트들이 동독 사람 같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뭔가 비밀경찰이 엿듣고 있는 느낌이에요. “당신 조심하는 게 좋아. 그들이 듣고 있어”라고요. 이건 진짭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게 진짜 걱정스럽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도는 없어요.



    146쪽 [스티븐 프라이] 그러니까 리 모두는 일종의 여론 조작용 재판 같은 것을 봐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사과를 해요. “성 정치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다음에 변호사에게 서명을 하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장면을 보고 그 사람 이름에 줄을 긋고 지워버리고요.



    152쪽 [마이클 에릭 다이슨] 저는 정치적 올바름이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제 오른쪽에 앉아 있는 두 신사 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두 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힘을 사용하고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이 그들만의 특별한 경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캐나다와 미국의 자유로운 시민인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존중할 방법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들 개인의 존재, 어떤 특정 집단이 번영하는 것을 방해해온 장애물이 거둬졌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입니다.



    155쪽 [미셸 골드버그] 저는 문화가 좀더 자유분방해지기 바랍니다. 좌파가 이런 현상을 종식시키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 이유는 지금의 문화는 위에서 강제적으로 힘을 행사해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무리를 이루는 현상인 면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돌파해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기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게 거품을 터뜨릴 유일한 방법이에요. 불안을 종식시키기 어렵다면 최소한 분산시킬 방법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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